물질 탐색의 난제를 푸는 마법사, AI ‘케멜레온’의 등장

화학 구조를 탐색하는 AI 케멜레온


"이 원소에 저 원소를 섞으면, 어떤 결정 구조가 나올까?"

재료 과학자라면 늘 품는 질문이다. 수많은 조합이 가능한 원소들과, 그것들이 이룰 수 있는 결정 구조의 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다. 이 광활한 '화학 우주' 속에서 우리가 아는 물질은 그저 바닷속 모래 한 알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제 이 미지의 세계를 안내해줄 마법사가 등장했다. 이름하여 케멜레온(Chemeleon). 인간이 쓰는 언어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화합물과 결정 구조를 ‘창조’하는 인공지능 모델이다.


과학자들이 신물질을 찾는 방법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뮬레이션과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 ‘고속 탐색’이 대세였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었다. 계산 자원이 많이 들고, 결과 해석도 복잡하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관심 있는 영역만 찍어 탐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케멜레온은 이 모든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마치 텍스트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AI처럼, 문장 하나로 물질을 그려내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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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화학을 이해한다고?


이 연구는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의 박현수 박사와 팀이 주도했다. 이들은 새로운 접근을 택했다. 기존의 물질 데이터를 그냥 집어넣는 게 아니라, ‘이런 화학 조성이면 이런 구조다’라는 설명을 함께 학습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LiMnO₄는 정방정계의 구조를 가진다"는 설명을 AI에 주면, 이 AI는 그 설명에서 의미를 뽑아내 물질 구조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이걸 가능케 한 핵심 기술은 ‘크리스털 클립(Crystal CLIP)’이라는 텍스트-그래프 간 대비 학습(contrastive learning) 방식이다.


쉽게 말하면, 글과 구조 사이에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낸 셈이다. 덕분에 AI는 단순히 데이터만 학습한 것이 아니라,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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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하면 만들어준다


케멜레온은 여기에 한술 더 뜬다. 구조를 단순히 예측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Li₆PS₅Cl 같은 고체전해질을 만들고 싶어"

"TiO₂의 새로운 결정형이 궁금해"


이런 식의 텍스트만 입력해도, AI는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결정 구조를 샘플링해낸다. 물론 그 중 일부는 에너지적으로 불안정하거나 기존 구조와 유사할 수 있다. 하지만 케멜레온이 뽑아낸 후보들은 대부분 실제로 계산해보면 상당히 안정적이거나 유망한 구조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Ti-Zn-O 삼원계, 그리고 Li-P-S-Cl 사원계 같은 복잡한 물질 조합에서도 케멜레온이 유의미한 신소재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였다. 특히 고체전해질 후보 물질 중에서는 실제로 합성 가능성이 높은, 동역학적으로 안정된 구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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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물질을 설계하는 시대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케멜레온이 정형화된 과학 언어가 아닌, 일상적인 문장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어, “LiMnO₄는 직교정계 결정 구조를 가진다”든지, “스피넬 타입의 구조를 갖는 Li-Ti-O 화합물을 생성하고 싶다”는 식의 자유로운 문장도 입력 가능하다.


이는 곧 연구 논문, 실험 보고서, 심지어 인터넷 포럼까지… 다양한 자료를 활용해 AI가 물질을 탐색하고 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는 뜻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AI가 말 그대로 수치(예: 밴드갭 1.5eV)를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구현하는 데에는 아직 어려움이 있고, 아주 복잡한 다원자 구조를 정확히 구현하기에는 확률적 모델의 한계도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결과만으로도, ‘텍스트 기반 물질 디자인’이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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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다시 그리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AI가 ‘화가’가 되어 이미지를 그려주듯, 이젠 AI가 ‘화학자’가 되어 신물질을 만들어주는 시대가 오고 있다. 케멜레온은 그 첫 발걸음이다.


앞으로 이런 모델이 더욱 정교해지고, 인간의 언어와 과학 데이터가 한데 어우러지는 시스템이 개발된다면 어떨까? 과학자들은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혹은 음성 명령으로 신물질을 디자인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기술이 기존의 방법과 ‘경쟁’이 아닌 ‘보완’ 관계라는 것이다. 인간이 관심을 가질 만한 방향을 미리 제시하고, 탐색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도우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말로 그리는 과학의 세계.

이제 그 시작을 함께 지켜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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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논문

Park, H.; Druruli, A.: Walsh A. Exploration of crystal chemical space using text-guided generative artificial intelligence; Nat. Commun, 2025, 16, 4379.